국가의 종류와 권리 의무
1. 국제법의 주체
법 주체성이란 개념은 왜 필요할까요? 어떠한 행위가 법률적으로 유의미한가를 평가하기 위하여는 그 행위를 한 실체(entity)가 법 주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먼저 판단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법질서의 주체만이 해당 법질서 속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법주체의 행동만이 법률적 효과를 발생시키며, 그 결과가 법률적으로 강제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 주체성이 없는 실체의 행위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국내법 질서에서는 누가 법 주체성을 가졌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비교적 쉽습니다. 모든 사람은 법인격을 향유하며, 법인격의 시점과 종점은 국내법으로 규율됩니다. 단체의 경우 어떠한 조건과 절차를 통하여 법인격이 부여되는지 역시 국내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특정 단체의 법인격 보유 여부를 판정해 주는 공적 절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법 질서에서는 무엇이 국제법상의 법인격을 가졌는가를 확인해 주는 공식적인 제도나 절차가 없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국제법상 법 주체성이란 개념을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국제법의 주체란 국제법상의 권리·의무를 향유할 수 있는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정의는 국제법상의 권리·의무의 향유자를 국제법의 주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순환논리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법률적으로는 법 주체성을 정의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제법의 주체란 국제법상의 권리·의무를 향유할 수 있다고 인정된 실체라고 파악한다면 좀 더 현실감을 반영한 정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가 국제법의 주체일까요? 국제법의 주체에 대한 모색이 국가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 대하여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국제법이란 원래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국가이기 때문에 국제법상의 주체로 인정되는 이른바 본원적 주체입니다. 일단 국가로 인정되면 모든 국가는 주권평등의 원칙에 따라 동일한 수준의 국제법상 법인격을 향유합니다.
20세기 초까지는 국가만이 국제법의 주체로 인정되었으며, 따라서 국제법은 곧 국가 간의 법이었습니다. 20세기를 거치면서 국제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국가 이외의 관여자들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국가 이외에 국제기구, NGO, 개인, 사기업 등 다양한 관여자들이 국제질서의 형성과 운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자들의 실제적 영향력과 상관없이 이들에게는 국제법 주체성이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의 참여도만으로는 국제법 주체성이 인정되지 않으며, 기존의 주체인 국가의 승인(또는 수락)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 이외의 국제법 주체들을 파생적 주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국가의 승인을 통하여 국제법 주체성을 인정받는 대표적인 존재는 국제기구입니다. 다만 국제기구가 어떠한 수준의 국제법상의 법인격을 갖느냐는 기구마다 달라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합의에 의하여 창설되는 국제기구는 다음의 ICJ의 설시와 같이 통상적으로는 국가가 부여한 범위 내에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하지만,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일정한 묵시적 권한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한편 국제기구는 이를 설립한 국가들이 해체를 합의하면 법인격을 상실하고 소멸했습니다. 예를 들어 50년의 존속을 예정하고 1952년 출범한 유럽 철석탄 공동체(ECSC)는 국가들의 당초 합의에 따라 2002년 소멸했습니다.
본원적 주체인 국가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파생적 주체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반드시 국제기구에 대하여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실체에 대하여도 국제법상의 법인격이 부여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실체가 국제법상의 법인격을 갖느냐의 문제는 선험적인 사실이 아니라, 국제법 질서의 필요에 따라 결정될 문제에 불과합니다.
개인은 오랫동안 국제법의 주체라고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반 국제연맹 시절부터 제한적이나마 개인은 국내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제법상의 권리를 인정받는 예가 등장했습니다. 20세기 후반 국제 인권법의 본격적인 발달은 개인으로 하여금 국제법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직접 실현시키는 현상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국제 형사책임의 추궁과 같이 개인에게 국제법상의 의무가 직접 부과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개인에게 국제법을 정립시킬 능력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인격의 내용은 국제기구에 비하여 더욱 제한적입니다.
NGO나 다국적 기업 등과 같은 비국가 행위자들에게는 현실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국제법 주체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특정 국가의 국내법에 따라 설립되어 국내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기업과 국가 간의 관계가 직접 국제법의 지배를 받기도 합니다. Convention on the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1964) 체제가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비국가 행위자에게도 언젠가는 일정한 국제법 주체성이 인정될 것인가 여부 역시 궁극적으로 국가들의 결정에 따르게 됩니다.
2. 국가의 개념과 자격요건
오늘날 국제기구, 개인, 기타 비국가 행위자가 국제법 질서 속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으나, 아직도 국가만이 유일하게 영토와 소속 국민을 가진 국제법 주체로 인정됩니다. 국가는 국제법 주체 중 가장 포괄적인 권리·의무 능력을 향유한다. 이에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이 국제법상의 국가라고 인정되는가입니다. 일찍이 G. 예리네크는 국민, 영토, 정부를 근대 국가의 3요소라고 제시하였고, 이러한 국가의 자격요건론은 아직도 타당합니다.
- 국민: 국민이란 통상 그 국가에 법적으로 소속되어 정착한 주민들이다. 국민으로서의 지위 획득은 각국의 국적법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국민은 소속 국가에 대하여 공동의 충성 관계를 갖습니다. 국민은 인종적 · 민족적·종교적 · 언어적으로 단일한 종류일 것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국가를 성립시키는 국민의 수에 있어서 최소기준은 없습니다.
- 영토: 국가는 국경으로 획정된 영토를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명확한 국경이 획정되지 않았더라도 대강의 국경이 결정되면 국가로 성립될 수 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할 당시 국경과 국민의 범위가 명확하게 정하여지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국가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내전이나 적국의 전시 점령으로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통제력을 일시 상실하여도 국가는 법적으로 계속 존속합니다. 영토의 크기는 국가의 성립요건에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1990년대 이후 안도라, 나우르, 산마리노, 투발루 등과 같은 초소형 국가도 모두 UN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1국 1표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 정부: 국가가 정치적 실체로 인정받기 위하여는 자국 영역에 대하여 실효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중앙정부를 가져야 합니다. 즉 국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통치조직을 갖추고, 국내법을 자주적으로 제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단 국가로 성립되면 타국의 일시적인 전시 점령이나 내란으로 인하여 정부가 실질적인 기능을 못하더라도 국가로서의 지위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확립된 정부를 가진 국가는 당연히 타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능력이 있다고 인정됩니다. 일제의 만주침략의 결과 1932년 수립된 만주국은 독립적 정부를 갖고 있지 못한 일종의 괴뢰국가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국가의 성립요건이 충족되면 국가성은 자동적으로 인정될까요? 국제법에 위반되어 탄생한 국가라도 당연히 국가로 인정될까요?
1965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 로디지아는 현지 이안 스미스 백인 정부가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고 백인 소수 지배 국가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러자 UN 안전보장 이사회는 남 로디지아의 독립선언을 비난하고, 각국은 이를 승인하지 말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다(1965.11.12 결의 제216호). 로디지아는 결국 1979년 영국의 시정권 아래로 복귀하였고, 1980년 다수 흑인 지배의 짐바브웨로 재탄생할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로디지아는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1973년 9월 포르투갈령 기니의 민족해방운동단체가 독립을 선언하고 영토의 약 2/3를 장악하자, 1973년 11월 UN 총회는 기니-비사우(Guinea-Bissau)의 독립과 주권국가 수립을 환영한다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당시는 포르투갈 군대가 주둔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포르투갈 식민정부는 다음 해인 1974년 3월에야 붕괴했습니다. 로디지아는 전통적인 국가기준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권에 위반된 국가 수립이었기 때문에 주권국가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반면 기니-비사우는 주권국가의 성립요건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자결권에 부합되는 신국가의 성립이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도의 무력개입이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인도의 무력개입의 합법성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었지만, 인도는 아무런 영토적 야심을 표시하지 않고 방글라데시인들의 민족자결권 실현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은 국제사회에서 쉽게 승인되었습니다. 반면 1974년 터키군은 북 사이프러스에 진주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였고, 1983년 북 사이프러스 터키 공화국(Turkish Republic of Northem Cyprus)의 독립이 선언되었습니다. UN 안전보장 이사회는 이를 법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하며, 회원국들은 이를 승인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안보리 결의 제541호), 북 사이프러스는 사실상 터키의 지원과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서구에서는 몬테비데오 조약 제1조에 표시된 국가의 성립요건을 관습 국제법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몬테비데오 조약이 주로 국가로서의 실효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이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는 특히 신생국가의 경우 민족자결의 실현 여부가 중요한 국가의 성립요건이 된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3. 국제법상 자결권의 주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는 국제법상 자결권의 주체인 인민(people)의 개념이 아직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과거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던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자결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인종적으로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 언어적 · 문화적 소수자들에게도 이 같은 자결권이 보장되고 있을까요? 캐나다의 퀘벡 인들도 국제법상 자결권의 주체로서 분리독립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모든 소수자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자결권이 인정된다면, 국가의 영토적 일체성이 무시되어 국가는 수많은 미세 집단으로 분리될 것입니다.
자결권의 무제한적 적용은 국제질서상의 커다란 위협과 무질서를 하게 됩니다. 이에 민족자결권의 수혜를 받아 독립을 달성한 국가들도 다시 내부 소수자들의 자결권 행사 요구에는 항상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민족 자결의 원칙은 국제법의 영역에서 이미 강행 규범의 성격을 획득하였지만, 향유 주체에 관하여는 아직 판단기준이 모호합니다. 현재는 소수자에 대한 내부적 탄압이 극심하여 집단의 기본적 권리가 말살되고 있는 상황이냐에 따라 사례별로 판단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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